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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책

from Ji@memo/책 2008/09/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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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국경인 루비콘 강에 이르러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마주한 루비콘 강은 국경 도시인 리미니에서 직선거리로 15km에 불과한 북이탈리아 속주와 로마 본국의 경계를 나누는 하나의 징표였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 권고라는 비상사태로 인하여 반역자가 되느냐의 갈림길 앞에 놓인 촛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13군단 10개 대대(4천500백여명으로 추산되는)에게 굳은 결심으로 외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라틴어: alea iacta est/alea jacta est)"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인 내전의 시대로 접어들어가는 험난한 과정을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말도 없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가 예상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리미니에 입성한 후페사로와 파노, 안코나와 아레초까지 점령하며 로마를 압박해오자, 시리아에 파견한다는 구실로 카이사르에게서 빼앗아둔 2개 군단을 거느리고 로마를 떠나, 카푸아, 카노사를 거쳐 브린디시에서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인 동방으로 간다.

갈리아와 이탈리아 반도만을 가진 카이사르와 물자와 인력이 풍부한 동방, 이집트, 에스파냐를 클리엔테스로 가진 폼페이우스는 압박, 포위공격을 한다는 구상을 가진 것이다.

3월 17일 한반 중에 브린디시에서 폼페이우스가 떠난 이후 3월 31일 저녁에 로마에 카이사르가 들어온 후 4월 7일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세력중 하나인 에스파냐를 향해서 진군한다. 4월 19일부터 6월5일까지 마르세유를 공략하며 피레네 산맥을 넘어 레리다와 코르도바를 거쳐 카디스까지 간 이후에 타라고나를 거쳐서 그가 마르세유에 돌아온 시기는 10월 25일 이었다. 그는 마르세유를 함락시키면서 서쪽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게 되었고, 동방과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집중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가 에스파냐를 평정하는 사이 30대의 청년 쿠리오는 4개군단으로 아프리카 속주를 공격하기 위하여 나섰지만, 누미디아의 유바왕과의 전투에서 2만명의 로마병사들과 함께 전사하게 한다. 내전기에 담담하게 그의 패배를 기술하고 있다.

"그의 젊음, 그의 용기, 그때까지 거둔 승리, 그리고 임무를 더욱 충실하게 수행하려는 책임감. 카이사르의 군대를 맡았다는 강한 자부심이 그로 하여금 성급한 판단을 내리게 했다"

또한, 지중해의 제해권을 되찾아오기 위한 전투에서도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가 폼페이우스의 용장 리보에게 꺽여 9천명의 병사와 40여척의 선단을 잃어버렸고 제해권 확보에도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실패를 딛고 일어선다.

12월 2일 수도로 올라온 카이사르는 독재관(딕타토르)에 취임 한 후 술라가 국법화 하였던 정적들의 자손에 대한 영구적인 공직추방을 해제하고, 국외 추방자의 귀국을 허가했으며, 로마의 각 속주에 카이사르파 인물들을 임명하고, 채무액의 탕감을 결정하고, 장롱 예금을 금지하였으며, 밀고제도를 완전 폐지하고, '이에타스(자애)'를 인격화하여 새겨넣은 화폐를 발행하였다. 이 화폐의 뒷면에서는 카이사르의 이름과 임페라토르라는 문자를 새겨서 화폐를 선전매체로 활용한 최초의 로마인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 후 그는 독재관을 사임하고 차기 집정관의 자격으로 종교의식과 체육활동을 겸한 라티나 축제를 주제하고 12월 13일 브린디시로 떠나게 된다.

이제 그는 11개월 전의 원로원 최종권고에 따른 반란자가 아닌 로마 최고위 직급인 집정관의 자격을 가지고 그리스에서 그를 기다리는 폼페이우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르세유와 에스파냐를 지원하는데에는 소극적이었던 폼페이우스는 근 1년동안의 기간에 9개 군단 5만 4천의 명사를 육성하였으며, 장인인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편성한 2개 군단을 합하면 총 11개군단 6만 6천여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거기에 궁병 3천명과 투석병 1천 2백명, 기병 7천명이 가세하니 그야말로 엄청난 대군의 위용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에 맞서게 될 카이사르는 10개군단이었으나 정원 6천명이 아닌 2천5백명으로 2만 5천명 정도였으며, 기병도 1천 3백명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군대는 로마 군단의 중추라고 부르는 백인대장(중간급 지휘관)이 탁월했다. 양보다 질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육상과 해상의 전력, 자금력, 전직 집정관이나 법무관등으로 대변되는 상급 지휘관의 턱없이 부족했으나. 병사들의 숙련정도와 중간급 지휘관에 총 사령관의 열량과 유효적절한 활용이 만나게 된 것이다.

기원전 48년 7월 6일. 카이사르는 브린디시를 떠나 오리쿰을 거쳐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품페이우스군 방어선을 완전히 막지못한 마르켈루스 진영지를 집중 공격 당하여 중무장 보병 960명과 기병 200기, 대대장 5명과 백인대장 32명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폼페이우스군의 추격을 뿌리치며 빠른 속도로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그것이 바로, 유인작전이었다. 폼페이우스가 58번째 생일을 한달 보름 앞둔 8월 1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그리스 중부의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마주하게 된다. 디라키움에 패한 후 유인작전을 펼치며 최후의 결전장을 찾아온 카이사르와 마지막 숨통을 조이려는 폼페이우스. 해발 500미터, 동서 20km, 남북 17km의 구릉평원인 이곳에서 중무장 보명 4만5천명, 기병 7천, 옛부하 2천이 더해진 5만 4천명을 거느린 폼페이우스 진영과 2만 2천의 중무장 보병, 1천명의 기병을 거느린 카이사르는 결전을 치룬다.

2배의 보병과 7배의 기병을 가진 적에게 맞서기 위하여 카이사르가 내놓은 비밀병기는 경무장 보명 400명과 1천기의 기병을 혼성하여 편성하는 것과 고참중의 고참들만이 할 수 있는 별동대로서 7천기의 기병 앞에 맞서서 속도를 줄이는 역할을 수행하여 극적인 승리를 일구어 낸 것이다. 그렇게 내전의 큰 흐름은 카이사르에게로 돌아왔다.

그 후, 펨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갔다가 로마병사 셉티무스에게 살해되어버린다. 기원전 60년에 삼두정치를 결성했던 동지였고 딸 율리아를 시집보냈던 폼페이우스는 그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가 관련된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마무리하고, 안티오키아를 거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또 하나의 유명한 말을 남긴 폰투스 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폼페이우스 잔당이 남아있던 아프리카원정을 마친다.

기원전 46년 54세의 카이사르. 로마인으로 태어난 사나이의 최고의 영광이라고 하는 개선식을 성대하게 거행한 그는 율리우스력(태양력)의 채택, 국립 조폐소를 창설하고 10년 임기의 독재관에 임명된 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기 위한 개혁들을 진행한다.

1년 후 북 이탈리아 속주의 도시계획, 시칠리아와 남프랑스 속주 주민들의 라틴 시민권 부여, 원로원 의원을 900명으로 증원하고 민회와 호민과의 유명무실과, 금과 은의 환산율 고정화, 이자율 상한제 도입, 지방의원의 피선거권개정, 해방노예에게 공직개방, 속주 재편성, 속주의회 인정, 원로원의 최종권고 폐지, 배심원 자격 개정, 곡물 무료 배급자를 15만명으로 축소, 무로 배급자를 심사하는 안찰관 재건,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 부여, 수도인 로마의 재개발과 공공수업 추진들을 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44년 파르티아 원정을 앞두고 종신독재관에 오른 후 원로원 회의장인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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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9 08:00 2008/09/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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