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3 - 승자의 혼미 @ 책
2008/05/21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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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승자의 혼미"는 그라투스 형제 중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법"과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곡물법"의 개혁시도와 암살로 이어진 실패. 그리고, 10년의 시간 후에 등장한 군벌 마리우스의 동맹시 전쟁과 "시민권 개혁", 그리고 술라의 집권을 서술하고 있다.
이어,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함께 제 1차 삼두정치를 이룬 파트너이면서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마리우스파 토벌을 통한 등장과 스파르타쿠스의 난 이후 남아있던 노예검투사들을 토벌과 해적진압, 오리엔트 평정의 가정을 소개하고 있다.
1. 그라쿠스 형제의 시대
외조부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이며, 한니발과 맞서 싸우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전사한 용장이었던 티베리우스와 같은 이름의 손자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당시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가 된 로마는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채택된 이후 귀족과 평민계급의 끝없는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지만,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법'에 의하여 모든 공직이 평민층에 개방되고, 민회의 권한을 강화한 기원전 387년 '호르텐시우스법'의 제정등으로 일부 봉합이 되었지만 한니발전쟁을 계기로 원로원에 외교권, 인사권, 재정권, 사법권, 군사권이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되었다.
그러나, 그 후 대규모 전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의 하한선을 내렸는데도 시민의 수는 줄어들어버렸다. 이는 가장이 전쟁터에서 종군하는 동안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이 생계를 꾸려갈 수 없는 무산자계급이 증가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당시 로마의 빈부격차심화였고, 확대였다.
기원전 134년 30세의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에 당선되어, '농지법(렉스 아그라리아)'을 제출하게 된다. '농지법'의 주요 골자는 임차할 수 있는 국유지의 상한선은 정하고, 국유지 임차권은 상속할 수는 있으나 양도는 할 수 없도록 만들며, 일정 규모(1천 유겔룸 = 250 헥타르)의 토지를 임차하고 있는 자는 국가에 반환하는 법으로서 개혁이 아닌 공정을 겨냥한 법이었다.
하지만, 호민관 티베리우스가 반환 토지에 대한 보상금 외에 무산자에게 제공할 보고금의 국조지원을 추가하자 보수파 원로원의원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게 되었고 민회의 압도적인 지지가 있엇지만 뒤따른 페르가몬 왕국의 국유지 문제가 원로원 주도의 국정운영에 대한 명백한 도전행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결국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33년 이듬해 호민관 선출을 위한 선거일에 자신의 지지자 300명과 함께 반대파에 의하여 암살되어 버린다.
티베리우스 암살 이후 기원전 124년 여름.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루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가이수스는 '농지법'의 재승인을 통한 자작농에 대한 장려책 만이 아닌 국가가 일정량의 밀을 사들여, 그것을 시가보다 싸게 빈민들에게 공급하는 일종의 복지정책인 '곡물법'을 가결시킨다.
또한, 17세 미만의 미성년자의 징집을 금지하는 '병역법'과 실업자 대책의 일환으로 '공공사업법', 활발한 경제활동의 받침이 될 수 잇는 '식민법', 당시 원로원에서 가지고 있던 배심원단의 원로원 구성 독점을 견제하는 '배심원 개혁법', 속주에서의 징세권을 비롯한 경제활동시 '기사계급'이 유리하도록 하는 '속주법' 등을 차례차례 가결시켜 나간다. 하지만, 당시 매력적인 시민권이었던 로마 시민권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는 '시민권 개혁법안'이 제출되면서 원로원 의원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하나로 뭉친 원로원은 가이우스가 로마를 비운 70일간에 걸쳐 또 다른 호민관이었던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배후 조정하여 가이우스가 제출한 법안들 보다 더 확장된 법안을 제출하면서 민회의 지지를 옮겨버리게 되고, 기원전 121년 카르타고 옛터에 식민시의 건설을 결정하는 투표가 이루어지던 날의 사건으로 반역자에 대하여 재판없이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집정권에게 부여하는 '원로원 최종 권고'로 암살당하게 된다.
한니발과의 전쟁 이후 확대된 지배영역과는 달리 원로원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 세계 전체의 지배자여야 한다.
로마는 이탈리아 전체의 지배자여야 한다.
원로원은 로마 시민 전체의 지도자여야 한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형제의 죽음은 이러한 로마의 정신적 쇄국을 바꾸기 위하여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게 된 것이다.
2.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로마빈민과 일반시민들의 권리를 지키려다가 잇따라 죽은 해로부터 10년 뒤. 미천한 가문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누미디아 문제로 인해 발생된 '유구르타 전쟁'에 기원전 109년에 집정권 메텔루스를 보좌하는 부장으로 임명되었다가, 기원전 107년에 집정권으로 선출되며 로마 정계의 중심에 등장하게 된다.
마리우스는 로마군단의 질적 저하로 인하여 계속 패하는 분위기와 농지개혁 없이 공화정 로마의 근간을 건드리고(빈민층 구제), 병역에 끌려나갈 필요가 없어진 하층민의 호평, 체제 내 개혁을 통하여 집정권의 정규 군단 편성을 기존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변경하는 '군제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그는 모병된 군단으로 유구르타 문제를 해결하고 기원전 101년 알프스 북쭉에서 야만족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기원전 100년의 집정관 선출을 포함하여 도합 여섯번이나 집정권에 선출되었다.
이후 평화가 9년째 이르던 기원전 91년.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30여년전 가이우스가 제안해 놓았으나 가결시키지 못하였던 '시민권 개혁법'을 되살리게 되지만, 암살당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한니발이 로마의 본토를 유릴 할때도 무너지지 않았던 로마 연합의 분열이 발생하게 되어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90년 당시의 집정권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시민권법'이라 명명되는 로마시민권 취득의 전면수용 법안을 제출하게 된다. 오랜 '동맹시'의 이혼도장 앞에 로마는 드디어 '리키니우스법'에 맞먹는 획기적인 법으로 일컬어지는 로마 국가의 방향전황이라 할 수 있는 '율리우스 시민권법'을 가결하게 된다. 로마는 이제 도시가 아닌
국가의 이미지가 된 것이다.
'동맹시 전쟁' 당시 남부전선의 영웅이었던 술라는 기원전 88년 집정관에 취임하여 오리엔트 폰포스 왕국의 불온한 움직임을 해결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70의 나이를 바라보던 마리우스의 오리엔트 정벌 야심에서 비롯한 유혈 충돌로 그는 편성 중이던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최초의 사례를 남기게 된다.
이후 마리우스와 술라는 거듭된 내전을 거치면서 대립하게 되고, 기원전 81년까지 종신 독재관에 취임한 공화정파 술라의 개혁으로 소수 지도체제에 입각한 로마 고유의 공화정 체제를 재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3. 폼페이우스의 시대
기원전 78년 술라의 죽음과 함께 반술라파(민중파)가 아닌 친술라파(보수파)속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폼페이우스에 의하여 로마 공화정 체제는 또 한번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술라가 죽은 지 1년 후인 기원전 77년 전직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의 무력에 의한 개혁이 좌절되면서 레피두스의 잔당들은 는 에스파냐로 달아나 세르토리우스와 합류하게 되는 속주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반란인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즉, 마리우스파와 술라파의 내전이 본국 로마가 아닌 에스파냐에서 연장전의 성격으로 기원전 80년부터 8년동안 치러지게 되고 폼페이우스는 바로 전쟁에 자격 연령이 부족함에도 '절대 지휘권'을 획득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더불어,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이루었던 크라수스도 기원전 73년에 검투사들의 반란이었던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기원전 70년 집정권으로 선출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호민관의 권위와 권력의 완전한 부활, 원로원 독점의 배심원 제도의 개혁 등을 통하여 술라 체제의 마지막을 닫게 된다.
이후 기원전 63년 오리엔트를 평정한 폼페이수스는 '위대한 폼페이우스'를 뜻하는 마구누스라는 애칭을 사용하지만, 결국 로마 역사상 위대한 개인으로 남는 사람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한니발 전쟁 이후 로마는 세력 확장으로 인한 경제의 활성화가 가져온 빈부격차. 그리고 그에 따른 로마군단의 질적저하.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체제 밖에서 개혁을 추진하였던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 사회변화에 따라 등장하게 된 군벌인 평민파 마그누스 등장과 그의 라이벌 술라의 공화정 사수의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공화정파로 분류되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공화정의 마침표를 찍기에 이른다.
로마인 이야기3은 바로 이러한 과정속에서의 로마를 들여다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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